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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생산성이라는 이름의 거짓말, 그리고 그 틈새

 

 


저는 오랫동안 의문을 품어 왔습니다. 이른바 "제3세계"가 가난한 이유는 "노동 생산성이 낮기 때문"이라는 그 말, 도대체 누가, 무슨 근거로 이렇게 말하는 걸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생각 실험을 하나 해 보겠습니다.

아시아의 청년, 서양의 청년, 아프리카의 청년이 있습니다. 편의상 아시아 청년은 "철수", 서양 청년은 "존", 아프리카 청년은 "응고메"라고 부르겠습니다. 세 사람에게 맨손과 맨발로 눈을 치우라고 시킵니다. 네 시간 동안 누가 더 넓은 면적을 치울까요?

결과는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응고메의 손이 크면 그만큼, 철수가 좀 더 날쌔면 그만큼, 존이 손발을 더 잘 쓰면 그만큼 조금씩 다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차이가 정말 미미하다는 사실입니다.

도구 없이 맨몸으로 일할 때, 인간의 생산성은 지역도 인종도 국적도 초월하여 평등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엄청난 생산성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이제 같은 세 사람에게 서로 다른 도구를 줍니다. 철수에게는 삽을, 존에게는 엔진 제설기를, 응고메에게는 트랙터를 줍니다. 상황은 즉시 뒤바뀝니다. 같은 시간 동안 트랙터를 받은 응고메는 삽을 받은 철수보다 비교할 수 없이 넓은 면적을 치웁니다.

생산성의 차이는 인간의 능력 차이가 아니라, 도구의 차이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진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묘한 속임수가 시작됩니다.

같은 맨손 노동을 하고도, 철수에게는 평방미터당 만 원을, 존에게는 오천 원을, 응고메에게는 천 원을 지급한다고 합시다. 그리고 나서 누구의 생산성이 가장 높은지 비교합니다. 결과는 당연히 철수입니다. 이렇게 회계 장부만 조작해도 "생산성"은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습니다.

"생산성"은 측정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는, 분배 구조의 그림자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진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핵심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같은 손수레를 끄는 광부인데, 왜 아프리카의 응고메는 하루 4달러를 받고, 서양의 존은 시간당 7달러를 받는가?

존이 열 배 더 열심히 일하기 때문일까요? 말도 안 됩니다. 존이 쓰는 도구가 더 좋기 때문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정답은 이것입니다. 존은 자신의 몫을 빼앗기지 않을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동조합이 있었고, 법이 있었고, 복지 제도가 있었고, 그를 지켜주는 국경이 있었습니다. 응고메는 그 힘이 없었습니다. 그의 노동은 값싸게 매겨졌고, 그 차이는 "생산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습니다.

"생산성이 낮다"는 말은 "네가 힘이 없어서"라는 말의 완곡한 표현입니다. 이것이 네 번째 진실입니다.

이러한 패턴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수백 년 전 식민지 시대부터, 서양의 지배자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피지배자들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해 왔습니다.

첫째, "너희 지도자들은 부패했다. 진정한 정의는 우리에게 있다."
둘째, "네가 가난한 이유는 네가 생산성이 낮기 때문이다. 더 열심히 일해라."

이 이야기들은 충고가 아닙니다. 지배의 도구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도 여전히 작동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이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으니까요.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생산성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도구와 자본에 대한 투자가 먼저여야 생산성이 따라옵니다. 투자 없이 생산성을 탓하는 것은, 씨앗도 심지 않고 "왜 열매가 없느냐"고 꾸짖는 것과 같습니다.

생산성이 낮아서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투자가 없어서, 자본이 없어서, 그리고 그렇게 만든 세계 질서 속에서 우리의 몫이 계속 빠져나갔기 때문에 가난한 것입니다.

너무 단순화 한 진단일까요? 하지만 저는 이 수준을 넘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현 국제 무역 체제는 그 자체로 약탈적이며, "생산성"이라는 이름의 거짓말 없이는 한 시간도 유지될 수 없는 허약한 건물입니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일까요? 이 체제 안에서 가능한 일일까요?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현 체제 안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현재의 국제 정세는 희망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첫째, 브릭스(BRICS)의 확장입니다. 중국, 러시아,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시작된 이 협력체는 최근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등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들은 달러 중심의 국제 금융 체제에 균열을 내고, 자체적인 결제 시스템을 구축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는 ‘회계적 방법’의 역이용, 즉 분배 구조를 다시 쓰려는 시도입니다.

둘째, 남남 협력의 강화입니다. 아세안, 아프리카 연합, 메르코수르와 같은 지역 블록들은 더 이상 단순한 자유 무역 협정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기술 이전과 공동 개발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는 ‘도구’를 내부에서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셋째,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의식의 변화입니다. 더 이상 "생산성이 낮아서"라는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기후 정의", "부채 탕감", "기술 주권"이라는 말들은 모두 "생산성 담론"에 대한 반격의 언어입니다. 이는 거대한 변화의 첫걸음입니다.

물론, 이 모든 움직임이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강대국들은 여전히 강력한 견제를 하고 있으며, 내부 갈등도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흐름이 멈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보기에 가장 현실적인 해법은 이것입니다: 현 체제를 인정하되, 그 체제의 모순과 균열을 정확히 읽고, 그 틈새를 파고드는 것입니다. 강대국 간의 경쟁을 활용하는 전략적 줄타기, 디지털 경제와 같은 새로운 영역에 선점 투자하기, 지역 블록 내부에서 "생산성"이 아닌 "호혜성"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무대 만들기.

이 모든 전략들은 하나의 공통된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생산성이 낮다"는 낙인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의 도구를 만들고, 스스로의 분배를 설계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생산성이 낮아서 못 산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것이 아니라, 약탈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탈의 정당화에 ‘생산성’이라는 이름이 도난당해 사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체제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균열은 이미 벌어지고 있고, 틈새는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틈새를 정확히 보고, 그곳으로 한 걸음 내딛는 것입니다.

더 열심히 일하라는 말에 지친 당신. 당신의 문제는 생산성이 아닙니다. 도구를 쥐어주지 않는 누군가의 손아귀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손아귀는 생각보다 약해지고 있습니다.

본질을 파고드는 의심만큼 우리를 지배의 언어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 의심을 가지고, 틈새를 향해 걸어갑시다. 그 길이 비로소 우리의 길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