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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윤석열은 동아시아에 불을 붙일 괴뢰

윤석열 괴뢰가 바이든과 회담하는 형식으로 공동 기자 회견을 준비했다. 이미 윤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여할 의사를 밝힌 바 있고 해서 이 방문은 미국과의 군사적 종속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메드베데프 안보회의 부의장은 대한미국이 러시아와 전투 상태에 있는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여한다면 러시아에 대한 적대행위로 간주하고 이에 대한 경고로 조선에 고성능 무기를 공여한다고 말했다.

 

미군은 4월 22일부터 6월 23일에 걸쳐 미군을 중심으로 종속군을 이끌고 "디펜더 23", 6월 12일부터 24일까지는 ​​독일군을 중심으로 공군 훈련, "에어 디펜더 23"을 벌일 예정이다. 전자는 1만 7000명, 후자는 1만 명이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러시아군은 사할린이나 치시마 열도에 적군이 상륙한다고 상정하는 군사 연습을 실시하고 있다.

 

일본 자위대는 미국의 전략에 근거해, 남서 제도에서 미사일 발사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이미 2016년에는 요나구니섬, 19년에는 미야코지마와 아마미오시마, 올 3월에는 이시가키섬에서 주둔지가 건설되었는데, GBIRM(지상 배치 중거리 탄도 미사일)로 중국을 포위할 계획이 실행되었다. ​

 

일본에는 "전수 방위(수동적 방어)"와 헌법 제9조라는 "제약"이 있기 때문에 ASCM(지상 배치 대함 순항 미사일) 개발이나 배치를 일본과 협력하는 형식으로 자위대 시설에 배치한 것이다. 

 

영국과 미국의 지원으로 메이지 ​​유신이 실현된 직후(1872년 9월), 일본은 제멋대로 '류큐 번'을 만들어 류큐국을 병합하고 2년 후인 1874년 5월에 대만으로 파병한 후 이듬해인 1875년 9월에 조선의 수도를 지키는 요충지인 강화도에 군함을 파견해 도발하여 "조일 수호조규(강화도 조약)"를 맺는 데 성공했다.

 

조선에서 갑오농민전쟁(동학혁명)이 일어나 체제가 흔들리고 있던 1894년에 메이지 정부는 다시 군대를 파견하고, 조선이 청나라도 군대를 요청하자 청일전쟁으로 번졌다.

 

1895년에는 "대륙낭인"으로 위장한 일본 정보장교들이 조선의 궁정을 습격하여 민비를 포함한 여성 3명을 능욕하고 살해했다. 그 중심에 있던 미우라 고로 공사는 그 후 추밀원 고문이라는 요직으로 갔다.

 

4년 후 중국에서는 의화단을 중심으로 반제국주의 운동이 퍼지고, 이 운동을 구실로 제정 러시아는 1900년에 중국 동북부에 15만 명의 병사를 파견했다. 그다음 해에는 이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베이징 의정서를 강제하여 열강은 베이징 교외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게 되었다.

 

늘 그래왔듯, 앵글로는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1902년 일본과 동맹협약을 체결했고, 일본은 1904년 2월에 인천 앞바다와 여순항을 기습 공격하여 러일전쟁이 시작된다. 그 전쟁에 돈을 댄 것은 로스차일드계 쿤 로브 은행의 제이콥 쉬프였다.

 

1905년 5월, 러시아 발틱 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해군에게 패배하자 미국의 "곤봉정책"이 등장했다. 미국은 일본에 강화 권고를 내리고 9월에 포츠머스 조약이 조인되어 일본의 대륙 진출 기반이 생겼다.

 

이 조약을 통해 일제는 짜르 러시아 가졌던 조선에서의 우선적 지위,  랴오둥 반도(뤼순, 다롄) 조차권, 창춘-뤼순 간 철도와 그 지선 그리고 이와 관련된 모든 권리와 특권, 연해주와 사할린 남반부, 캄차카 어업권 등을 양도받았다. 하지만 배상금의 지불은 인정되지 않았다.

 

강화조약이 맺어진 2개월 후, 카츠라 타로 총리는 미국에서 "철도왕"이라 불리던 에드워드 해리만과 남만주철도의 공동 경영에 합의했지만, 포츠머스 회의에서 일본 전권을 맡은 코무라 쥬타로가 이 합의에 반대하여 각서는 폐기된다. 러일전쟁에서 획득한 이권(남만주 철도 경영권)을 미국에 빼앗길 수 있다고 코무라가 주장한 것으로 보아, 이권을 미국에 건네줄 카츠라의 또 다른 밀약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에는 씨오도어 루즈벨트와 친밀한 카네코 켄타로우(하버드 대학 동기)가 있었다.

 

일본 정부의 사절로 미국에 있던 카네코는 1904년에 하버드 대학에서 앵글로색슨을 위해 일본이 러시아와 싸운 것이라고 연설하고 다녔었다. 그런데 러일전쟁 이후 루즈벨트가 일본은 스스로를 위해 싸운 것이라 썼고, 결국 조선을 강점한 것은 앵글로색슨의 이익이 아닌 일제의 국익으로 연결된다. 일본의 조선 강점은 결국 미국의 전략이기도 했다.(James Bradley, The China Mirage)

 

미국이나 영국에 있어서 일본이나 대만은 대륙을 군사 침략하는 거점이며, 조선반도는 교두보였다. 일본인은 그들의 용병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국익으로 여긴다. 이 구도는 지금도 살아있다.

 

주권이 없는 조선반도 남쪽과 일본은 앵글로색슨족의 대러 혐오의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