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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시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 그 뿌리와 본질(1/3)

1부: 13세기 러시아에 대한 사전 지식

 

교황 인노첸시오 3세

 

1204년 –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동방 십자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군 전쟁이 중동에서만 이슬람을 겨냥한 것이라고 잘못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짓입니다. 사실, 당시 서방 제국주의의 공식적인 변명은 "무슬림 이교도"로부터 예루살렘을 해방시키는 것이지만 십자군은 "그리스 분파", 다시 말해 정교회 기독교인을 근절하거나 개종시키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이 반정교회 십자군의 가장 악명 높은 에피소드는 1204년의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한 4차 십자군 전쟁입니다. 도시는 정교회당, 수도원을 약탈하고 심지어 수녀원을 강간하고 불태운 서구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에 의해 3일간 완전히 그로테스크한 약탈, 겁탈,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서구 "기독교인"들은 매춘부를 정교회 총대주교좌에 앉혔습니다. 대량 학살과 증오의 분출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라틴 교회의 사고방식과 이데올로기의 중심적인 특징이 될 무언가의 발현된 가장 초기의 사건이었습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얼마나 지독한 서구 기독교인인지 여기서 참고하세요.)

하지만 중요하지만 훨씬 덜 알려져 있지만 정교회에 대한 라틴 교회의 또다른 증오가 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

 

 

1242년 –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의 북부 십자군:

병사들을 성지로 인도한 전임자와는 달리,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유럽 북부와 동부의 "이교도"를 "진정한 신앙"으로 개종시키고자 하는 매우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가 그러한 "이교도 땅"의 일부이며 정교회 기독교인도 이교도라고 생각했습니다. 튜턴 기사단(로마를 약탈하고 파괴한 프랑크족의 영적 후계자)에게 내린 그의 명령은 그들이 만나는 모든 이교도를 개종시키거나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량 학살 명령은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c)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세르비아인을 개종, 살해 또는 추방하라고 자신의 군대에 내린 명령과 매우 유사했습니다. 대부분의 역사 책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비공식적으로 행해지던 종교재판을 공식화 한 사람으로 알려집니다. 그래서 이 신사가 "그리스 분파"에게 자비를 베풀 기분이 아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교황과 그 무리들은 막강한 수호자인 알렉산드르 네프스키(Alexander Nevsky) 왕자와 맞닥뜨렸습니다.

 

 

성 알렉산드르 넵스키

 

성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문명 선택"

 

교황의 십자군을 상대하기 전에도 알렉산드르 넵스키는 1240년에 유명한 Neva 전투에서 스웨덴 왕국의 북부 러시아 침공을 격퇴해야 했습니다 .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사실은 Alexander Nevsky가 동방으로부터의 몽골 침략을 물리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문명적 선택"이라 부를만한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러시아가 교황청과 몽골에 동시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선택은 간단했습니다. 하나는 복종하고 다른 하나는 저항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굴복당하기 위해서 그가 선택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르 왕자(나중에 러시아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찬사를 받을 사람)는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지 물었을 때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한 참으로 성경을 깊이 이해한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적의 정책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알렉산더는 몽골인의 유일한 목표가 러시아인에게서 세금을 빼내는 것이지만, 그들은 누구도 개종시키거나 교회를 박해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야만적인" 것으로 추정되는 몽골인들은 교회와 그 성직자를 존경했으며 결코 박해하지 않았습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십자군은 라틴 교회가 이전에도 여러 번, 그리고 이후에도 또 여러 번 하게 될 것처럼, 마주치게 될 모든 정교회 기독교인을 특정하여 개종시키거나 살해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성 알렉산드르 넵스키는 몽골 칸에 복종하고 1242년에 저 유명한 빙상 전투에서 그가 패배시킨 십자군과 싸우기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14세기, 점령당한 우크라이나 지역

 

서부 러시아 점령, 제2의 로마의 몰락, 모스크바의 부상

 

러시아에 두 번이나 패한 서방 지도자들은 일시적으로 침공 계획을 포기했지만 러시아의 승리로 서방 엘리트들이 러시아 국민이나 문화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예상대로 서방으로부터의 다음 침략의 물결은 14세기 초에 시작되어 크레보 연합이 1385년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연합을 봉인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 이후, 나중에 우리가 "우크라이나"라고 불릴 모든 것이 라틴 교회에게 완전히 정복되었습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동로마의 멸망은 "제2의 로마"의 종말이자 로마 멸망 후 만 1000년까지 살아남은 문명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서로마 제국은 476년, 동로마 제국은 1453년에 멸망)

라틴 교회는 소위 피렌체 연합(이것은 기만입니다. 여기 참조)으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콘스탄티노플을 돕겠다는 약속과 위협을 조심스럽게 혼합하여 정교회 세계를 굴복시키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콘스탄티노플은 메흐메트 정복자 군대에 함락되었습니다 . 따라서 이때부터 모스크바는 로마 문명의 계승자이자 마지막 자유 정교회 기독교 왕국인 "제3의 로마"가 되었습니다. 모스크바는 이때부터 정교회에 대한 페피스트(Papist) 증오의 초점이 될 것입니다. 이 다음 서구의 공격은 1595년에 있을 것이며, 그것은 정말 파괴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교황 클레멘스 8세

 

1595년–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우크라이나를 잉태하다 

 

16세기 말까지 서부 러시아의 대부분은 200년(14~16세기) 동안 라틴인에게 점령되었고, 동부 러시아(몽골의 굴레, 13~15세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상대로 라틴 점령하의 정교회 기독교 농민들의 상황은 끔찍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실제적인 목적에서 노예(이스라엘 샤학)가 되었습니다 .

많은 원인으로 인해 중세 폴란드는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국가에 비해 발전이 뒤처졌다. 강력한 봉건형의 군주국(의회 기관이 없음)은 특히 카시미르 대왕(1333-70) 치하의 14세기에만 그곳에서 형성되었다. 그가 죽은 직후 왕조 및 기타 요인의 변화로 인해 귀족 거물들의 권력이 매우 급속하게 발전하여 1572년까지 왕을 우두머리에서 추방하고 배제하는 과정이 있었다. 정치 권력에서 다른 모든 비귀족 재산은 거의 완전히 배제되었다.…(중략)....이 과정이 폴란드 농민(중세 초기에 자유를 가졌던)의 지위를 완전히 노비화하는 지경에 이르게 했고, 노골적인 노예와 거의 구별할 수 없었고 확실히 유럽에서 가장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폴란드 농민들(중세 초기에 자유로웠던) 지위가 완전히 노예화 되었고 노예제도와 거의 구별되지 않았으며, 확실히 유럽에서 가장 최악이었다. 항변권도 없이 생사를 결정할 힘을 가잔 폴란드 귀족들은 그들의 농민들을 가지고 놀며 이웃 나라로 확장하여 폴란드 영토 확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새로운 농민들이 추가되어 식민지화 된 폴란드 동부(벨로루시아와 우크라이나) 상황은 최악이었다.

 

 

실제로, 그 지역 귀족들은 노예 소유의 특권을 누리기 위한 폴란드 점령자 앞에서 배교하고 그들의 농민을 팔아넘기는 데 더 만족했습니다(러시아가 농노제를 알지 못할 때!). 이 시기는 또한 우크라이나에 유대인 공포증이 태동한 기간이기도 합니다.(Israel Shahak)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뭔가는 해야 했고, 확실히 교황(클레멘스 8세)은 찾았습니다. 즉, 지역 정교회 ​​기독교인을 라틴 교회로 강제 개종시킨 이른바 브레스트 연합( Union of Brest )입니다. 이렇게 해서 폴란드 귀족, 유대인 감독자들, 특히 "ad majorem Dei gloriam(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회 포어)"이라는 슬로건 아래 잔학 행위를 정당화한 예수회가 연합하여 정교도 농민에 대한 악랄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특히나 정교회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에 탁월했던 원탑이 "성" 요사팟 쿤체비(Josphat Kuntsevich)였습니다. 결국 농민들에게 린치된 Kuntsevich는 근처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묻혔습니다. 대량 학살자인 성 그레고리우스(신학자라는)와 성 요한 크리소스톰(설교자라는)와 함께. 라틴계는 여전히 이런 대량 살인자들을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자"라고 부릅니다. Kuntsevich에 대한 전형적인 Papist 성인전을 보며 소름끼치려면 여기를 보세요) 그는 여전히 현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크게 존경받고 숭앙받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시기의 점령과 정교도 박해 기간 동안, 현대 "우크라이나"라는 것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영토가 아니지만, 분명히 하나의 문화적 실체입니다.

 

 

"우크라이나 국가"의 민족 형성입니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국가는 태어나서 살다가 죽습니다. 국가는 실제로 발명되고 창조됩니다.(Shlomo Sands: 그The Invention of the Jewish People) 사실, 20세기는 많은 나라들이 아무것도 없는 무(ex-nihilo)에서 발명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전세계 국가들을 살펴보세요. "국가"는 깊은 역사적, 문화적 뿌리를 가질 필요가 없으며, 합법적인 역사 기록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국가 만들기"에 필요한 모든 것은 자신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식별하는 특정 양의 인구입니다. 나머지는 나중에 만들어지거나 발명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국가"와 같은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일부 러시아인의 견해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자신을 "우크라이나인"으로 식별하는 충분한 사람들이 있다면 별도의 "우크라이나 국가"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 나라가 역사에 흔적이 없다거나 건국 신화가 우수꽝스럽다는 것은 그 구성원들이 뚜렷한 공통점을 공유하는 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러시아 국가와 근본적으로 다른 "우크라이나 국가"의 존재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라틴 교회의 엄청난 업적입니다. 서구 세계는 러시아인과의 역사적 뿌리에서 차단하고 새로운 국가인 우크라이나를 건설하려는 열망을 분명히 성공시켰습니다.

중요한 것은 몽골인들이 현대 러시아 국가 창설에 유사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입니다. 결국, 러시아 문화의 "기초"는 무엇일까요? 10세기 러시아가 기독교화 되기 이전의 슬라브 문화요? 네, 하지만 그건 일부입니다. 제2로마의 멸망 이후 로마 문명의 지속요? 네,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결정적으로는 아닙니다. 10세기 이후 기독교 신앙의 채택?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소 작은 모스크바 대공국에서 성장한 러시아 *국가* 는 확실히 비잔티움이나 고대 슬라브 Rus가 아닌 몽골 문화와 국가 기술로 형성되었습니다. 고대 키예프 루스가 결국 두 개에 별개의 국가를 탄생시켰습니다. 하나는 교황의 점령이 낳은 우크라이나이고 다른 하나는 몽골의 점령이 낳은 러시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Grattez le Russe, et vous verrez un Tartare (러시아인을 긁으면 아래에 타타르인이 있음을 알 수 있음)"라는 러시아인 혐오 발언은 맞습니다.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인를 긁어보라. 그러면 그 밑에 있는 교황을 발견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요점이 분명히 나옵니다. 우크라이나 국가는 교황권이 천 년 동안 정교회 기독교를 증오한 결과물입니다. 현대 랍비 유대교가 실제로 반기독교에 불과한 것처럼, 현대 우크라이나의 국가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광신적이고, 절대적으로 비합리적이며, 편집증적인 증오와 두려움에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 히스테리적인 러시아 공포증에 참여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른바 민족주의( 탈을 쓴) 강경파는 분명히 참여합니다. 이 점이 우크라이나를 이해하는데 너무나 결정적이어서 이렇게 역사를 짚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붙이자면, 라틴 교회는 20세기에 엄청난 변화를 겪었고 심지어 그 예수회까지도 반종교개혁 이전의 전통과 사상에서 벗어났습니다. 일부 라틴계(카톨릭)에는 정교회 기독교인과 러시아인에 대한 증오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대부분은 소위 "에큐메니칼 대화"를 통해 정교회를 교황권에 "통합"하거나 삼키려는 욕망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물론 일반 로마 가톨릭 신자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이 역사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교황권의 목표는 여전히 동일합니다. 바로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법과 감성이 바뀌었습니다. 증오와 공포가 이제는 "사랑의 대화"입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가짜 민족주의자들과 Uniats 사이에서는 그 마음가짐이 실질적으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스테판 반데라(Stephan Bandera)
같은 사람부터 그의 현대 후계자이자 우익섹터의 지도자인 드미트로 야로시(Dmytro Yarosh)에 이르기까지 우크라이나 가짜 민족주의자들은 위에서 언급한 Josphat Kuntsevich의 살인적인 증오를 키워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시간을 3세기로 건너뛰어 20세기 초 파시즘과 "국가사회주의"의 뿌리를 살펴봐야 합니다. 이렇게 건너뛰는 이유는 이 세기가 우크라이나에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건너뛸 기간의 주요 특징은 기본적으로 표트르 1세 제국이 된 러시아의 권력 상승과 여러 차례에 걸쳐 러시아에 완전히 점령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국가의 약화입니다.(2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