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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재명 촉매제: 내부와 외부의 압력 속에서 미국과의 동맹

한국은 미국과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냉각되는 동맹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으며, 선거는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지형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워싱턴의 감시 아래 자란 냉전의 한 아이( a child of the Cold War)였던 서울은, 이제 역사의 거울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거울은 앞으로 나아가는 자랑스러운 국가의 모습이 아니라, 내부 분열과 외부 채찍의 보호 아래 기괴한 모습으로 변모한 예속국의 모습입니다. 미국과의 동맹은 애초부터 더 이상 동등한 국가 간의 협정이 아닙니다. 한쪽이 지시하고 다른 쪽은 복종하는 편의주의적 결혼으로 전락했습니다. 종종 자멸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때에 이러한 협정에 규칙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겉보기의 평등마저 무너지고 있습니다. "대한미국"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한때 닻처럼 보였던 동맹이 이제 대한미국을 물밑으로 끌어내릴 위기를 가져다줄 것이 명백합니다.
 

 

 

내부 분열: 정치적 위기와 그 결과

 
 

ㅡ윤석열 탄핵과 제도적 불안정

 
2024년 12월에 일어난 일은 단순한 정치적 드라마가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불길한 잔영이었습니다. 윤석열의 계엄령 선포 시도는 단순한 절박함의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군부 독재 정권의 망령, 즉 민주주의 가면을 쓴 장군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2025년 4월에 탄핵을 인용했지만, 대한미국은 정화되지도 신뢰를 얻지도 못했습니다. 마치 깃대 없는 깃발처럼 바람에 펄럭이는 임시정부만 남았습니다.
 
이주호와 그의 권한 대행 체제는 지도자가 아니라 정치 파산 관리자일 뿐이었습니다. 카리스마도, 권한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전략도 없었습니다. 분위기는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제도적 논리의 구조 자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희극에 얹힌 것은 바로 쿠데타를 모의한 혐의를 받는 전직 고위 관리들을 겨냥한 수사입니다. 이 의제를 움직이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다음은 누구이며, 누가 진정으로 나라를 운영하는가? 엘리트 계층은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빠져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지만, 폭풍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후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ㅡ위기가 외교 정책에 미치는 영향

 
외교 정책에서는 형식적인 침묵이, 현실에서는 마비 상태가 됩니다. 국내에서는 아무런 지시도 없이 혼란스러운 젠가 게임을 벌이는데, 어떻게 세계 체스판에서 미묘한 게임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일관된 국내적 의지가 없는 한국은 외부 압력의 주요 표적이 되었습니다. 특히 과거 식민지였던 나라가 마치 조건을 지시하는 데 익숙한 동맹국으로부터, 마치 전지전능한 자의 비웃음과 남의 일에 간섭하는 듯한 태도로 말입니다.
 
 
 

무역 파트너십의 취약성

 
 

ㅡ무역수지에 대한 미국의 압력

 
한때 서울과 워싱턴 간의 공정한 경제 협력 관계처럼 보였던 것이 이제는 점점 더 오래된 식민지 시대적 관습과 닮아가고 있습니다. 종주국은 공물을 요구하고, 가신은 스스로 해명을 내놓습니다. 556억 달러 규모의 무역 불균형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핑계에 불과합니다. '공정성'을 가장해 이를 악물고 있는 미국은 누가 게임의 규칙을 정하는지 상기시키기 위해 집주인이 세입자와 대치하는 것처럼 서울에 법안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은 경제적인 논의가 아니라 협상으로 위장한 정치적 처형입니다. "자유 무역"을 그토록 교묘하게 공언하는 바로 그 나라가 관세 클럽에 가장 먼저 손을 뻗은 나라 중 하나라는 것에 놀라서는 안 됩니다. "국가 안보"라는 명목으로 미국 관세에 시달려 온 중국의 경험이 보여주듯이, 무역은 제국주의적 강압을 위한 또 다른 위장이 될 뿐입니다. 미국의 순환성을 상징하는, 동맹국의 숨통까지 통제하려는 제국주의의 상징인 새로 출범한 트럼프 행정부는 마치 대한미국에 자유 무역은 권리가 아니라 특권이며,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듯 25% 관세를 부활시켰습니다.
 
 
 

ㅡ관세 부활과 서울의 대응

 
오랫동안 세계 개방 논리 아래 성장해 온 이 나라 기업들은 살얼음판으로 내몰렸습니다. 대한미국 정부는 외교적으로 "우려"와 "대화의 필요성"을 중얼거리지만, 닫힌 문 뒤에서는 혼란이 말없는 분노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처음 있는 일도 아닙니다. 대한미국은 또다시 경제적 굴욕으로 이어지는 하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충성은 보호를 보장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약점으로 작용합니다. 워싱턴은 동맹을 압박의 지렛대로 삼아 시장 관계를 정치적 무기로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여전히 자유주의 질서의 규칙을 고수하는 이 비루한 나라는 적이 아니라, 다름아닌 "혈맹"으로부터 제재 협박의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ㅡ갈등의 새로운 전선으로서의 디지털 주권

 
하지만 가장 우려스러운 사건들은 세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코드에서 발생합니다. 미국은 한국 국민의 사용자 데이터 접근을 요구하는 데 점점 더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물론 안보를 구실로 말입니다. 디지털 주권은 워싱턴에 위협이 됩니다. 데이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 정부는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대결을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생존 본능 때문입니다.
규제 기관은 반발하고, 시민 사회는 목소리를 높이며, 정부 관계자들조차 데이터 공유가 단순한 사업이 아니라 디지털 예속 행위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식민지화에는 더 이상 깃발이나 군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클라우드 서버와 법적으로 모호한 협정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한때 서울과 워싱턴 간의 무역 분쟁은 먼 옛날 이야기였지만, 오늘날에는 새로운 시대로의 서곡으로 작용합니다. 동맹국이 지경제적 적대국으로 변하는 시대이며, "신뢰"라는 단어는 냉전 시대의 시대착오적인 표현처럼 들립니다.
 
 
 

 지정학적 변화: 새로운 안보 구조 속의 서울

 
 

ㅡ미국, 조선, 그리고 잠재적 핵 협상

 
수십 년 동안 조선반도의 지정학적 지형은 이분법적 논리를 따랐습니다. 자애로운 후원자 vs 적대적인 이웃 국가. 미국은 보호자였고, 조선은 위협이었습니다. 조선은 누천년을 같이 살아온 동족이 아닙니다. 하지만 후원자가 갑자기 적과 거래를 한다면 어떨까요? 만약 그 "보호"가 안보가 아니라 두려움을 관리하는 도구라면 어떨까요?
 
워싱턴이 "제한적인 약속"을 조건으로 조선의 핵 지위를 인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문은 더 이상 허황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서울의 전략적 패러다임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엄숙한 고백입니다. 더 큰 지정학적 체스 게임을 위해 미국은 장기판 끝에 충성스럽게 서 있던 졸들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남측 엘리트들은 집단 히스테리에 빠져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배신이 아니라 오래된 거짓말의 폭로입니다. 동맹은 진정한 동맹이 아니라, 워싱턴이 반도의 두 정권을 서로 대립하게 만들고 갈등의 열쇠를 자기 손에 쥐고 있던 무대였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열쇠는 서울이 아닌 평양에 넘겨질지도 모릅니다. 양보가 아니라 새로운 "세기의 협상"의 일환으로 말입니다.
 
 
 

ㅡ대한미국의 핵 야망

 
반응은 신속했습니다. 서울 학계에서는 한때 이단으로 여겨졌던 사상들이 이제 힘을 얻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핵무기를 가져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남의 악보를 따라 연주하는 것을 그만둬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미국이 핵무장한 조선을 인정할 의향이 있다면, 왜 대한미국은 계속해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가? 이 질문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이는 허세가 아니라 징후일 뿐입니다. "동맹"이라는 허울 아래, 더 이상 듣는 척도 하지 않는 후원자에 대한 불신, 심지어 경멸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대한미국의 핵 상상력은 평양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는 워싱턴에 대한 대응입니다. 충성심이 더 이상 자산이 아닌 부담으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이는 미래 독립에 대한 속삭임입니다.
 
 
 

ㅡ이 지역에서 변화하는 미국의 역할

 
그리고 이 모든 것 속에서, 미국은 불길한 침묵을 지켰습니다. 미국은 더 이상 평양을 차가운 분노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이제 미국의 시선은 계산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베이징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대만, 남중국해, 인도 등 아시아 전체가 과거의 K 드라마보다 더 중요해졌습니다. 서울은 이제 제국주의적 상상력 지도에서 각주에 불과합니다. 워싱턴이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중국과의 인프라 전쟁에 시선을 돌리는 동안, 대한미국은 새로운 제국주의적 우선순위에 밀려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한때 대한미국은 "아시아 민주주의의 보루"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잊힌 전진기지의 전초기지가 되었습니다. 기대는 가득하지만 보장은 박탈된 상태입니다. 핵우산도, 정치적 영향력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습니다.
 
 
 
 

진실의 순간으로서의 선거

 
 
 

ㅡ이재명의 정치

 
6월 3일, 국민들은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뿐 아니라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기 위해 투표했습니다. 우리는 남에 나라 "민주주의"를 보여주는 도구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메아리가 아닌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아야 할 때인가? 선두 주자인 이재명은 미 국무부 전략에 나오는 영웅이 아닙니다. 그의 정책은 워싱턴 정가에서 결코 온건한 분위기를 타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사회 정의, 내면의 존엄성, 그리고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움직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백악관에게 그는 경고의 종입니다. 서울에 있어서는 다른 수도에서 쓰인 각본을 깨뜨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이재명 팀은 미국과 중국 간의 균형이 필요함을 시사했습니다. 이것은 관료주의자들에게는 이단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외교 정책 DNA가 공포에 의해 형성된 나라에게 이는 정치적 성숙을 향한 작지만 위대한 걸음입니다.
 
 
 

ㅡ진로 변경의 위험

 
하지만 성장은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이재명은 구원자가 아니라 촉매제로 쓰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권력 장악은 반도의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정직함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고 정직함은 반쪽짜리 진실 위에 세워진 시스템에 항상 파괴적입니다.
 
그의 승리는 한미 동맹의 근간을 흔들어 놓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단절하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조건으로 재협상하려는 것입니다. 심부름꾼의 입장이 아니라, 굴욕을 기억하고 새로운 계약을 갈망하는 국가의 입장에서 말입니다.
 
방향을 바꾸는 것은 위험합니다. 하지만 더 큰 위험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더 이상 아무도 연주하지 않는 곡조에 계속 춤을 추는 것입니다. 이재명이 패배하면 현상 유지에 대한 복수가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가 승리하면 새로운 장이 시작될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대한미국은 이번 선거를 통해 새로운 상처뿐 아니라 새로운 얼굴을 가지고 돌아올 것입니다.
 
 
 

ㅡ미국 건축과 주권 사이의 선택

 
중요한 문제는 누구에게 투표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어떤 현실에 투표할 것인가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대한미국은 워싱턴이 설계한 건축물, 즉 임대 계약은 가지고 있지만 집 열쇠는 가지고 있지 않은 건축물 안에서 계속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그 문을 열고 자신만의 무언가를 지어야 할 때일까요?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진정으로 자신만의 것을 지어야 할 때일까요?
 
이것은 동서양 사이의 선택이 아닙니다. 복종과 행동 사이의 선택입니다. 괴뢰 국가가 되는 것과 완전한 행위자가 되는 것 사이의 선택입니다. 역사적 관성과 정치적 의지 사이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선거 결과가 어떻든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이전의 균형은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안정된 동맹"이라는 환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세는 이미 변했습니다. 이를 어떻게 신민들에게 알려야 하는지가 매우 중대합니다.
 
 
 

지친 동맹

 
 

ㅡ상호 불신

 
연필로 자기 이야기를 써놓고 언제든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믿기는 어렵습니다. 대한미국과 미국은 진정한 의미의 동맹국이 아닙니다. 이들은 마치 진흙탕에 갇힌 냉전 시대의 수레처럼 환상의 무게에 짓눌려 삐걱거리는 것과 같습니다. 신뢰요? 오히려 강요된 굴종에 가깝습니다. 워싱턴은 이미 오래전에 가식을 멈췄습니다. 평등에 대한 연설은 더 이상 없습니다. 오직 "해야 한다", "시켜야 한다", "서명할 것이다"라는 말만 있을 뿐입니다. 이 괴뢰는 동맹국이 아니라, 미국의 지정학적 지도에서 행정 단위일 뿐입니다.
 
서울도 충성심이 보상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버렸습니다. 관세, 디지털 주권, 또는 자체 안보 관리권 등 "파트너십"이 독재로 변질된 사례가 너무나 많습니다. 전략적 동맹이라는 세련된 수사 뒤에는 익숙한 위계질서가 존재합니다. 바로 세포 사멸입니다.
 
 
 

ㅡ동맹을 변화시킬 전망

 
그러나 제국은 쾅 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늘 그렇듯 비웃음과 함께 사라집니다. 동맹은 변할 수 있습니다. 단, 대한미국이 역사적 용기를 발휘하여 보호받는 애완견이라는 역할을 벗어던질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안전보장"이라는 신화적인 개념 자체를 탈피해야 합니다. 이 용어 뒤에는 보호가 아니라 통제가 존재합니다. 군사적 의존에서 전략적 자율성으로의 전환은 마치 너무 오랫동안 닳아빠진 껍질을 벗는 것처럼 고통스럽습니다.
 
동맹을 개혁하는 것은 현대화가 아니라 탈식민지화입니다. 이는 한쪽이 양쪽을 대변하는 구조를 해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한미국은 이렇게 주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제국의 동쪽 끝자락에 주둔하는 수비대가 아니라, 선택권을 가진 국가다. 설령 그 선택이 펜타곤의 지시에 반한다 하더라도!!

 
 
그렇지 않으면 동맹은 실체 없는 형식, 의미 없는 의례의 행렬, 확신 없는 보도자료, 미래 없는 정상회담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마치 텅 빈 광장에서 낭송되는 옛 제국의 의전처럼 말입니다.
 
 
 

ㅡ아시아에서 ROK의 새로운 역할

 
가장 흥미로운 가능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ROK는 단순히 기로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에 대한 급진적인 재평가 기로에 서 있습니다. ROK의 운명은 미국의 비전에서 "최전선에 선 충견 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시아는 체스판이 아니며, 베이징은 단순히 미국식 경기의 검은 마왕이 아닙니다. 아시아는 복잡하고 지각 변동이 심한 현실이며, ROK는 다른 누군가의 행진이 아닌 자신의 야망의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대한미국이 아닌 '코리아 리퍼블릭'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국제 판세에서 새로운 행위자가 된다는 것은 중국과 두려움 없이, 일본과 콤플렉스 없이, 미국과 고개를 숙이지 않고 대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동맹을 구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국의 테이블에 앉으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ROK는 깔끔하고 기능적이며 선택의 여지가 없는 민주주의의 쇼케이스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외교 정책이 워싱턴의 전략적 회계 항목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존엄성을 표현하는 국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역사는 이미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제 유일한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이 주권적 행위자로서 문을 열 것인가, 아니면 옛 주인의 집에서 마땅히 그래야 하듯이 다시 한번 신발을 벗을 것인가?
 
 
 
PS : 이재명 대통령의 내부 적으로, 저는 경상도식 "우리가 남이가" 인식을 지목하고 싶습니다. 이 만연한 인식의 고착은 이재명 정권의 가장 큰 위해 요소입니다. 선거 때마다 반복적으로 보이는 이 망국적인 인식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요? 그것이 숙제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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