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공습(1944년 6월 6일)은 아마도 미국 군사 역사상 가장 극적인 순간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 작전은 지금까지 대규모 예산 편성으로 세 편의 유명한 영화로 그려졌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수륙양용 상륙작전,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공중 투하작전, 전쟁 대서사시 '지상 최대의 날'(1962년)입니다.
수많은 비디오 게임에서 각색되고 미국의 문화와 정치에 스며들어 있는 가장 위대한 세대 신화가 더해진다면, 미국인들이 D-Day 상륙작전으로 전통적인 미군상을 형성하는데 그 어떤 사건보다도 강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해도 무방합니다.
이 때문에 노르망디 전투를 정서적으로 중립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오히려 어려워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르망디 전투가 친숙하기 때문에 이 해변을 중심으로 논의하고 싶어 하는데, 이것은 분명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만 다시 듣고 싶어 하는 일종의 어린아이 같은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물론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지적인 관점이나 역사적으로 볼 때 특별히 흥미로운 부분은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미국의 관점 밖에서 노르망디에 대한 허구를 재조명되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들은 영국계 캐나다인들이 영웅담에서 밀려나거나 소외당하는 것에 지쳤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미국의 우월성에 대한 찬양에 지쳤거나, 과거 미국의 영광을 약화시키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네,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충동들 일지는 몰라도, 다시 말하지만 그닥 흥미로운 것은 아닙니다.
노르망디 작전은 미군의 궤도에서 중대하게 출발점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독일 국방군(Wehrmacht) 과 정면으로 맞서려는 미국의 초기 시도는 다소 저조했습니다. 이유는 실패한 작전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미군이 우월한 화력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카서린 협곡 전투(Battle of Kasserine Pass)는 신참인 미군들에게 참혹한 경험이었고, 유명한 전기 영화 패튼은 아프리카에 주둔한 미군들의 불쌍한 처지를 묘사하면서 시작하고, 이들을 채찍질하기 위해 패튼 장군이 달려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런 미군이 노르망디에서 전혀 다른 종류의 동물로 변했습니다. 미국은 허약한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 미친 듯 화력을 동원하기보다는, 영화 속 패튼의 표현대로 "like crap through a goose(졸라 빠르게)" 독일군을 분쇄하는 작전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독일군은 항상 뛰어난 기동 능력과 유동적인 작전에서 우위에 있다고 자부했지만, 노르망디에서 압도당하는 굴욕을 당하며 파괴되어 이때부터 미국은 군사 허세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대독일 미국의 전쟁은 두 개의 다른 국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단계는 북아프리카에서의 작전과 이탈리아에서 독일군과의 초기 조우입니다. 이 국면에서는 독일의 기갑부대와 싸우는 방법을 배우는 입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초기 작전에서, 미군은 노련하고 치명적인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가파른 학습 곡선에 그렸고, 카세린 협곡이나 살레르노 해변과 같은 곳의 미군 지휘관들은 더 민첩하고 단호한 독일군에 대한 답으로 미국의 엄청난 화력에 크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 단계는 독일이 대부분의 작전을 수행하면, 미국은 그들에 대항하기 위해 우수한 화력과 항공 자산을 사용하는 반응형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미군은 자신이 원할 때 번개처럼 움직일 수 있는, A급 연합군 무기 및 병력으로 부상했습니다. 지중해 전장에서 처음으로 미군은 Wehrmacht를 마비시키고 공격을 격퇴할 수 있는 자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프랑스 주둔 미군은 스스로 강력한 기동 능력을 보여주고 파괴적인 공격 태세를 갖춥니다. 다시 말해, 1942~43년은 독일 기갑 군을 격퇴하고 독일 기동을 질식시키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고, 1944-45년은 미군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기동 하는 것을 배우는 단계였습니다. 군대는 결국 유기체이므로, 배우고 발전시키는 것이고, 프랑스에서 싸웠던 미군은 많은 면에서 아프리카 해안으로 떠밀려온 경험이 없는 군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에서의 미국 작전의 세부 사항을 살펴보기 전에, 작전 기동과 관련된 미 육군의 두 가지 특이한 점, 즉 실질적으로 쉽고, 종종 불필요했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 좋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모든 전투원들 중에서 미국이 기술적인 관점에서 볼 때 기계화와 동력화에 가장 쉽게 참여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산유국 중 하나이며, 중동의 생산이 아직 시작되지 않은 1930년대에는 특히 그러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은 전 세계 산유량의 절반 이상을 담당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은 자가용과 상업용 트럭이 대량 도입되고 그에 상응하는 공룡 자동차 산업을 가진 고도로 동력화된 사회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한마디로 미군이 원하는 순간에 번개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일 국방군과는 달리 미군은 이동할 수 있는 틈과 공간을 끊임없이 찾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었습니다. 본래 미군은 무서울 정도의 물질적 우위와 광폭의 공세로 적을 씹어먹는 화력 집약적인 유기체였지만, 기회가 생기고 독일군 진지에 맛있는 틈이 생기자 미군은 전투 공간 깊숙한 곳까지 전투 지원을 확장할 수 있는 완전한 기동 보병과 연료 비축, 압도적인 공군력으로 업계의 그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독일군은 기동작전을 수행한 방대한 경험과 역량에도 불구하고, 전쟁 말기의 미군들과 상대하기에는 위험한 작전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1인치만 준다면, 1마일도 갈 수 있다"는 사례였습니다. 특히 패튼과 같은 강력한 기동지휘관이 운전대를 잡고 있을 때, 잠재되어 있던 미국의 기동력을 감안하면 작은 틈이 순식간에 대재앙으로 변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브래들리: 코브라 돌파 작전
이 시점에서 빨리 사과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영미 연합군의 1944년 작전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중추적인 순간이 저 유명한 노르망디 침공과 특히 6월 6일 상륙작전이었지만, 이 문제를 여기서 자세히 논의할 생각은 없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작전 전략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D-DAY 상륙작전은 이 주제에 맞지 않고, 해군과 수륙양용 작전에 관해서는 추후에 다뤄질 예정입니다.
상륙작전에 큰 힘을 쏟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해변의 풍경은 서부전선에서, 특히 미국인들에게 가장 유명한 전쟁의 현장이지만, 노르망디 상륙이 노르망디 전투에서 가장 쉬운 단계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놀랄 일입니다. 상륙한 해변 5곳 중 한 곳( (Omaha 진지)만 특별히 잘 방어되었고(동맹군 정보기관은 오마하에 있는 독일 제352보병사단을 감지하지 못함), 다른 해변들은 연합군이 비교적 어렵지 않게 상륙했습니다. 히틀러가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이 반격에 실패했다는 통념과는 달리, 6월 6일 상륙 해변 근처에는 기갑사단(제21사단)만 있었고, 적절한 반격을 준비하려던 시도는 연합군의 공군력과 해군 포병력이 뒤섞여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따라서, D-Day 자체는 작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극적으로 자유로웠습니다. 대학살이라는 일반적인 느낌과는 대조적으로 (오마하 해변에서 싸웠던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그런 느낌이지만), 상륙은 극히 일부만의 사상자로 이루어졌고, 엄청나게 우세한 연합군은 다소 저항하던 독일군을 압도했습니다. 사실, 오마하 해변을 제외하고 연합군의 손실은 충격적일 정도로 가벼웠고, 150,000명이 넘는 병사들이 첫날에만 총 10,000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그중 절반도 안 되는 사람들이 사망했습니다. 매년 수백만 명이 죽어가던 이 전쟁의 규모를 감안하면, 이는 적은 수치였고, 독일군이 해안에서 방어하는 척하며 거의 2년 동안 "대서양 장벽"을 준비해 왔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승리의 빛은 훨씬 더 밝게 빛났습니다. 따라서 독일군의 방어망은 하루 만에 무너졌고 연합군 사상자 수가 적었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따라서 6월 7일, 연합군 지휘부의 분위기는 행복에 가까웠습니다. 손실이 가벼워서 추진력을 쌓을 때가 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대신, 연합국들은 해변에서 멀어지면서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D-Day 상륙 작전에 대한 독일의 초기 반응은 처음에는 약간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독일 기획자들이 연합군이 작전 항구를 장악할 수 있는 칼레(Calais)에 상륙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엄청난 수의 연합군이 해안에 쏟아져 내리고 있음에도, 독일군의 뇌에는 노르망디가 단지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한 것인지 의문에 차 있었습니다. 이러한 의심에도 독일 국방군의 신경계는 여전히 빨랐습니다. 6월 6일 밤부터 이미 독일군 부대가 전투 공간으로 뛰어들어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일주일 안으로 독일군은 다소 일관성 있는 방어선을 구축했고, 연합군은 노르망디에서 곧바로 탈출하여 진격할 것이라고 위협하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독일군에게 싸움이 잘 되지 않을 것이라는 징후는 이미 있었습니다. 문서상으로 독일군은 프랑스에 매우 강력한 기갑 부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독일군은 연합군의 상륙에 대응하기 위해 서부전선에 특별히 기갑 자산을 축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종합적으로 보면, 9개 기갑 사단과 1,400여 대의 장갑차로 무장한 1개 기갑척탄병 사단이 나타났습니다. 창의 끝은 새로운 장비와 신병에 특권적으로 접근(모집)할 수 있는 완전 무장한 제1 SS 기갑단이었습다.
전술적인 측면에서 독일 기갑 군, 특히 호랑이들과 표범들을 보유한 베테랑 중갑 연대는 전쟁에서 최고의 자산이었고, 따라서 작전 문서상으로는 9개 나치 기갑 사단과 노르망디에서 충돌할 것이라는 전망은 연합군에게 두려움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문서상으로 일어나지 않았고, 독일군은 지도상 선들보다 실제 전선 배치가 훨씬 더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기갑부대는 프랑스 전역에 흩어져 있었고, 이상적인 상황 하에서도 그들을 모두 노르망디로 집결시킨다는 것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연합국들은 처음부터 완전한 공중 우위를 누렸고, 이 사실은 독일군의 접근 움직임을 크게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지휘관들은 다양한 경로에 병력을 분산시키고 대부분의 행군을 밤에 해야만 했습니다. 그 지역에 들리는 비행기 소리만으로도 독일군 대열은 도로에서 빠져나와 나무 아래로 엄폐할 수 있었고, 도처에는 부서진 다리와 포탄이 깔린 도로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독일군은 기갑 군을 노르망디로 돌진하여 연합군 교두보를 무너뜨리는 것을 선호했고 실제로 시도했지만, 독일 증원군의 도착은 집중적인 행동을 위해 신속하게 조직될 수 없는 물방울과 같았고 대부분의 부대는 도착하는 도중에 이미 연합군 항공기에 손실을 입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표범 기갑사단장 프리츠 바이에를라인 장군은 참모진과 함께 노르망디에 도착하여 자신의 기갑 군(이들은 분산된 종대를 이루며 천천히 그 지역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과 그의 군단 사령관인 제프 디트리히와 접촉이 두절된 채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있었습니다. 사단장과 군단장이 서로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명령을 주고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적진에서 고군분투하는 군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독일 증원군은 안정적인 흐름 속에서 전장으로 흘러들어오고, 연합군은 훨씬 더 많은 숫자로 해안에서 밀려오고, 잠재적으로 폭발 혼합물이었지만, 결과는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두 군대는 일종의 결정적인 교전을 작정하고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노르망디를 빨리 탈출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군은 반격을 위해 병력을 신속히 배치하여 편성여 "그들을 바다로 몰아내기"를 원했지만, 두 군대 모두 원하는 것을 달성할 수 없었습니다. 독일군 부대는 교두보를 짓밟기에는 너무 느리게 전선에 도착했지만(연합군 해군 포병과 항공기를 고려할 때 이것이 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임) 노르망디에서 연합군을 차단할 만큼 충분히 빨리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남쪽으로 도망치지 않고 연합군이 깊이 약 20마일, 길이 약 65마일의 진지를 열심히 개척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6월 말, 노르망디 전투장은 이상할 정도의 대칭성을 지닌 다소 특이하고 진기한 성격을 띠었습니다. 독일군 두 부대가 전선에 도착하여 두 연합군 부데와 맞은편에서 진지전을 벌였습니다. 전선의 서쪽 끝에는 독일 제7군이 미국 제1군과 맞붙었고, 동쪽에서는 독일 제5기갑군이 영국 제2군을 막아냈습니다.
전선이 결집하기 시작한 바로 이 시점에서 연합군의 작전은 순전히 썩은 운과 감시로 방해를 받았습니다.
영국-캐나다군이 가장 동쪽에 있는 해변에 상륙하고, 미국군이 서쪽에 상륙하는 연합군의 배치 패턴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해변 배치는 단순히 연합군이 침공하기 전에 영국을 배치했을 뿐이었습니다. 영국군은 도버와 브라이튼과 같은 지역을 중심으로 영국 남동부에 배치되었고(실제로는 독일의 해협 횡단 침공 가능성을 예상하여 1940년 말부터 많은 부대가 그곳에 있었다), 도착한 미국인들은 단순히 공간이 있는 해안의 서쪽을 따라 다트머스, 포틀랜드 및 풀과 같은 항구에 더 가까운 거점을 세웠습니다. 침공군이 서로 얽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배치했기 때문에, 미국군은 연합군의 오른쪽(서쪽)에, 영국군은 왼쪽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좋은 것 같았습니다. 간단하게 실용성이 있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일단 그들이 해변으로 밀어닥치자 이 지형에 대칭적인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발견했고, 따라서 연합군의 전선 배치가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연합군의 왼쪽 (영국, 동부 지역)에서 노르망디는 목가적이고 구불구불한 평원이 펼쳐지며, 작은 마을들과 가끔 있는 과수원이나 나무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즉, 기계화 작전을 하기에 이상적인 지형입니다.
그러나 서부 노르망디는 정말로 정반대였습니다. 전설적인 생울타리들로 서로 분리된 작은 농장들과 들판들의 퍼즐 조각들이었습니다. 울타리는 빽빽하고, 다양한 나무들, 덤불들, 그리고 엉겅퀴들로 만들어진 것들이며, 주로 흙 제방 위에 심은 것입니다. "헷지(Hedge)"라는 용어는 작고 귀여운 이미지를 연상시킬 수 있지만, 노르망디에서 헷지들은 약 3~3.5m 높이와 1~2m 두께의 식물들의 거대한 엉킴이었습니다. 평화로운 시기의 생울타리들은 목초지와 농장의 울타리들(편리하게 부동산들 사이의 경계를 표시하고 가축들을 가두거나 바람을 피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44년의 노르망디 생울타리들은 전쟁터를 수천 개의 작은 요새들로 구획하는 역할을 했는데, 사격 위치, 기관총, 대전차 배치물들, 그리고 사수들을 숨길 수 있는 빽빽한 관목들로 둘러 싸여 있었고, 종종 너무 두꺼워서 탱크들조차 쉽게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영국군이 기계화 기동에 이상적인 개방된 평원에, 연합군 우익에 미국군은 거대한 포위망과 한 번에 한 개의 전장에서 소수의 분대, 기관총, 박격포와 같은 소규모 부대 행동으로 독일군의 진지를 끊임없이 줄이려고 하는 전망에 맞닥뜨립니다.
두 전선 사이의 차이는 이보다 더 극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노르망디 서부는 깊고 푸른 녹색이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목초지와 울타리가 쳐진 들판이고, 노르망디 동부는 황갈색 밀밭 평야입니다. 이곳은 완전히 다른 두 전장이었습니다.
동맹국들의 문제는 그들에게 이상적이었던 배치와는 정반대로 배치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분명한 이유에서, 미군은 훨씬 더 강력하고, 부유하고, 강력한 병력이었습니다. 미국은 영국보다 기본적으로 훨씬 부유하고, 잠재적으로 더 강력했으며, 어쨌든 영국은 이 시점까지 5년 동안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훨씬 더 많은 사상자를 냈고, 더 많은 물적 손실을 입었으며, 대체품과 기동 자산이 전반적으로 부족했습니다. 이것은 영국 육군 전체를 점점 더 조심스럽고, 피곤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리한 기동 지형의 이점을 덜 활용하는 저에너지 동맹국은 개방된 평원에 늘어서 있는 반면, 훨씬 더 많은 전투력과 장비를 가진 동맹국은 좁은 지역에 갇혀 극심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독일군은 자신의 자산을 거의 최적의 방법으로 배치했습니다. 독일군은 최우선 자산인 기갑 부대를 서둘러 개방된 지형인 동쪽으로 보내고, 지치고 불안한 영국 기갑 사단에 맞섰습니다.
참담한 연합군의 배치 결과는 노르망디 작전의 거의 즉각적인 중단과 증가하는 사상자로, 미국과 영국 모두 매우 다른 종류의 심각한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미국에게 문제는, 나뭇잎 밑에 숨어있던 독일 수비병들에게 엄청난 이점을 제공할 생울타리를 헤치고 나가야 하는 어려움이었습니다. 노르망디 해변이 위대한 드라마 현장이라는 우리의 일반적인 느낌과는 대조적으로, 미군들은 해변에서 나와 보카주(bocage, 생울타리 국가라고도 불림) 안으로 들어간 후에야, 사상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상륙 후 6주 동안, 미국 최전방의 보병사단들은 입대한 병사들 중 60 % 와 장교 70 %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단연코 최악의 피해를 입은 사단은 미군 제90사단으로, 소총 소대 인원의 무려 90 %, 중대급(중위와 대위)의 무려 150 %(기존 장교가 전멸하고 교체 인원의 절반을 더 잃음)를 잃는 말도 안 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미군은 상륙 후 단 몇 주 동안 총 40,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이는 미군들에게 엄청난 손실이고, 지치게 하며, 격분하게 만드는 약 20마일의 진격에 대가였습니다.
미군과 마찬가지로 영국군도 어려운 시기를 보냈지만 그 이유는 매우 달랐습니다. 영국군은 공격에 유리한 지형에 배치되었지만, 9개 이상의 독일 기갑사단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영국군의 모든 돌파 시도를 완전히 격퇴당했습니다. 특히 영국군은 독일 중기갑대대를 상대로 근접 전에서 자신의 행운을 시험하는 것이 끔찍한 생각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습니다
6월 13일 아침, 전체 영국 기갑 여단이 빌러스 보카주에서 501 Waffen-SS 중위 미하엘 비트만에게 발견됐을 때, 궁극적인 상황을 초래했습니다. 비트만은 대열을 지어 도로를 따라 전진하는 영국군을 기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타이거로 두 발을 발사하여 영국군의 선두 전차들을 파괴하고 나머지를 도로에 가두었습니다. 비트만과 다른 중대원들은 마비된 영국군 대열 옆을 평행으로 달리며 총을 발사했습니다. 그리고 대열로 차를 몰고 들어가 여러 대의 전차들을 박살내고 지원 차량들까지 덮쳤습니다. 타이거의 총기 난사로 영국 전사들이 분노하여 반격할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기에 시간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15분도 걸리지 않아 약 24대의 전차, 9개의 하프트랙, 수십 개의 트럭, 자동차, 총이 비트만 중대에게 파괴되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문제의 축소판이었습니다. 영국군은 불가능한 지형으로 특징지어지는 전선에 비극적으로 배치되어 (전쟁에서 최고의 기계화 병력으로 남아있는) 독일 정예 기갑 부대의 전술적 우위에 대처할 수 없었습니다. 그 결과, 7월 초까지 연합군은 노르망디에서 첫 번째 주요 목표(영국군에게는 Caen, 미국군에게는 St. Lo)를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이 모든 것들이 독일군이 승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선은 치열하고 잔인한 투쟁으로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진격을 늦췄습니다. 모두 사실입니다. 문제는 소모로 인해 양방향이 모두 막혔고, 독일군은 장기적으로 그 부담을 감당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SS 기갑사단이 도시를 점령하려는 영국의 시도를 반복적으로 물리치고 악랄하게 싸웠던 칸(Caen ) 주변 지역에서도 결과는 독일군에게 나쁜 소식이었습니다. 이 기갑부대는 결국 독일군에 남아있는 가장 귀중한 자산이었고, 이곳에서 방어를 위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이 소중한 기갑사단을 어떤 결정적인 '반격'을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 병력, 재료, 화력을 가진 적에 대한 위치 방어를 위해 사용했다는 사실은 위안은 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일련의 전술적 성공이 작전상의 재앙으로 귀결되는 고전적인 시나리오였습니다.
그래서 동맹군과 독일군 모두 전선을 개방하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습니다. 독일군은 전장에 기동성을 회복하여 어떤 결전을 꾀할 수 있기를 원했고, 연합국들은 마침내 우수한 전투력을 완전히 배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7월 중순까지 이미 25만 명의 병력과 엄청난 5만 8천 대의 차량이 영국에서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배치할 공간이 단지 노르망디 해변에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연합군 측에서 미국 제1군 야전사령관인 오마르 브래들리 장군에게 맡겨졌습니다. 그가 착안한 해결책은 "미국의 압도적인 화력"이라는 새로운 모티브와 "집중적이고 계층화된 공격", 즉 미국판 소련 종심전을 결합했다는 점에서 개념적으로는 다소 매력적이었습니다.
브래들리는 독일 전선의 좁은 부분을 선택하여 그곳을 분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코브라 작전이라는 이름의 뒤이은 계획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즉, 강력한 양갈래 물결의 기계화 군단을 조립하는 것과 파괴를 위해 선택된 분야에서 독일군을 분쇄하기 위한 압도적인 공중 폭격을 계획하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브래들리는 소련에게 친숙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배치된 매우 강력한 공격 부대를 조직했습니다. 첫 번째 물결은 3개의 보병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너비가 6,000 야드, 즉 사단당 2,000 야드에 불과한 매우 좁은 전선으로 조작되었습니다. "보병 사단"이라고 명명되었지만, 미군은 이러한 대형들로 경쟁자들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의 기계화 및 화력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물결은 일단 개방되면 독일 전선의 빈틈을 이용할 예정이며, 2개의 기갑 사단과 추가적인 보병 사단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모두 합쳐 이 6개 사단 구성은 조셉 콜린스 장군 휘하의 미 7군단으로 지정되었지만, 전투력 측면에서 이것은 군단보다 큰 완전한 야전군이었습니다.
제7군단의 코브라형 배치는 소련의 붉은군대가 공격적인 작전을 위해 선호하던 방식과 사실상 똑같아 보였는데, 소련은 에첼론(사다리 대형)이라고 불렀을 것이고, 제1파에서는 화력 집약적인 돌파군을, 제2파에서는 중무장하고 완전히 기동화된 제압군이 포함된 두 개의 조로 편성했습니다. 브래들리는 즉흥적인 전장 편법으로 미국과 동등한 격전력을 갖춘 상대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고, 폭발물을 사용할 수 있는 미국의 독특한 무제한적인 능력 덕분에 더욱 치명적이 만들 것입니다.
미국 제7군단의 강력한 타격력은 전체 전쟁에서, 그리고 실제로 역사상 가장 놀라운 공군력과 짝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브래들리는 독일 전선이 6,000 야드 너비의 구간(약 6km 미만)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지도에서 이 구역을 직사각형을 표시하고 공군에게 폭발물로 완전히 떡칠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불행하게도 폭격 계획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 전선은 본질적으로 독일군과 미국군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지상뿐만 아니라 공중에서도 극도로 혼잡한 작전 환경입니다. 코브라 작전을 위해 배정된 항공기에는 총 1,500대의 공격용 4 엔진 폭격기와 2,200대 이상의 전투기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비행기들은 고작 8 평방킬로미터의 목표 지역의 회반죽화가 요구되는데, 이를 애정을 담아 "카펫(융단)"이라 불렀습니다. 많은 비행기들이 공중에 동시에 떠다니면서 미군 지상군으로부터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작은 목표물을 타격하려고 할 때, 실수의 가능성은 엄청날 것입니다.
브래들리는 실수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동서 도로를 시각적 표식으로 구현했습니다. 그는 그 도로를 공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전방의 명확한 표식으로 보았고, 공군이 도로와 평행하게 날라, 폭격이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가해지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독일군 진지에 가할 그들의 폭격 시간을 극대화하고 준비 구역에서 브래들리 돌격대 쪽으로 비행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미 공군은 이 제안에 별로 열의가 없었습니다. 독일군에게 최대 시간으로 노출된다는 것은 결국 반격을 당할 시간도 최대화된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도로와 평행으로 비행한다는 브래들리의 요청은 무시되었고, 대신에 공군은 도로에 수직으로 접근하는 계획을 짰습니다. 즉, 브래들리 지상군 머리 위를 비행하는 것입니다.
7월 23일로 예정된 작전은 불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거대한 공중 타격 부대가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기지로 즉시 소환된 폭격기 편대 중 한 대가 소환 명령을 받지 못하고 폭격을 시작해 "킬박스"를 놓치고 미 30사단의 진지를 폭격해 버렸습니다. 악천후가 해소되기를 기다린 끝에 7월 25일, 코브라가 재가동되었고, 미군 폭격기의 첫 번째 물결은 또다시 탑재물을 너무 빨리 방출하여 브래들리 지상군을 폭격하게 됩니다. 전쟁의 더욱 역겨운 우여곡절 중 하나는, 여기서 아군 지상군 사령관 레슬리 맥네어 장군이 죽었는데, 부하들을 격려하고 사찰하기 위해 최전방으로 나갔었던 때입니다. 유럽 전장에서 살해된 가장 높은 계급의 미국 장교는 미 공군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아군의 위치에 떨어진 폭격은 거대한 코브라 공격의 극히 일부였습니다. 나머지 대부분은 지정된 카펫 위에서 포효했고 그곳을 지옥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4개 엔진의 무거운 폭격기 구름이 킬 박스 위에 죽음의 폭풍을 형성했고 한 시간 동안 거대한 총 60,000개의 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 즉, 분당 1,000개의 폭탄, 대부분 100 파운드의 파편 폭탄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폭격이 끝나자 브래들리 지상군은 독일군을 확인 사살하기 위해 1,000개 이상의 포탄으로 문을 열고 탱크와 보병들이 투입되었습니다. 이 거대한 폭격은 독일 3개 사단, 즉 중기갑 사단, 제2 기갑 사단, 제5 강하엽병단(공수부대)을 종말론적인 화염 속에 처넣었습니다. 브래들리는 도로에 너무 구멍을 내지 않도록(아군 차량과 탱크의 통행에 지장을 주므로) 파편 폭탄의 사용을 특별히 요청했지만, 엄청난 폭격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기에 충분했고 대부분의 독일 수비수들을 완전히 기절시키고 지상 공격에 저항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독일군 기갑사단장 프리츠 바이에를라인 장군은 미국의 융단 폭격을 견뎌냈고, 그러한 격렬한 공격을 견디며 살아남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장 좋은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숨는 것 외에는 저항하거나 행동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하늘을 보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폭격기들의 폭풍을 보며 모두가 몸을 피해 달아나려 미친 듯이 뒤엉켰던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다음 시간은 연기, 먼지, 강렬한 소음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여 완전히 방향 감각을 잃었습니다. 폭격이 해제될 때까지 바이에를라인은 최전방이 달의 표면처럼 보인다고 보고했고, 병력의 70%가 "죽거나, 부상을 입거나, 미쳤거나, 멍해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코브라 작전의 지상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거의 즉시 독일 기갑부대가 굴복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습니다.
공격 이틀 후, 브래들리는 당시 동맹이었던 소련이 말했듯, "두 번째 에헬론"이 시작됐습니다. 7월 27일, 미국 기갑 사단의 전투 삽입으로 독일 전선을 활짝 열고 미국 육군은 독일 후방으로 미친 듯 달려갔습니다. 다음날(7월 28일), 그들은 쿠탕스 (Coutances)를 점령하고 Panzer Lehr의 지휘소를 밀어버렸습니다. 7월 29일, 독일 기갑사단 후방 지역 깊숙이 있는 기갑 정비대를 통과한 다음 비로소 노르망디가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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