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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카렐 차페크: 내가 공산주의자가 아닌 이유



카렐 차페크.


내가 공산주의자가 아닌 이유

이 질문은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갑자기 묻기 시작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누구도 내가 왜 농민당원이나 국민민주당원이 아니냐고 묻지는 않을 거라는 겁니다. 농민당원이 아닌 것은 어떤 특정한 견해나 인생관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공산주의자가 아닌 것은 반공산주의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산주의자가 아닌 것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하나의 신조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질문은 나에게 일종의 안도감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내게 공산주의와 논쟁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았고, 될 수도 없다는 점을 스스로에게 변명하도록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공산주의자였다면 훨씬 수월했을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고치는 데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믿음 속에 살았을 테니까요. 내가 가난한 자 편에 서서 부자들을, 굶주린 자 편에 서서 금권 세력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을 테니까요. 무엇을, 어떤 이유로 생각해야 하고, 무엇을 미워하고 무엇을 경멸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았을 테니까요. 그런데 지금 나는 가시덤불 속의 벌거숭이처럼 느껴집니다. 빈손으로, 어떤 교의로도 보호받지 못한 채, 나는 세상을 돕는 일에 무력함을 느끼며, 종종 내 양심마저 깨끗이 지키는 방법을 모를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편인데, 대체 내가 왜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았을까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가난한 자들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변의 모든 것이 역겹게 느껴질 만큼 무시무시한 궁핍을 목격했습니다. 어디에 있든, 나는 화려한 궁전들로부터 도망쳐 가난한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며, 무력한 구경꾼이라는 굴욕적인 역할에 괴로워했습니다. 이런 궁핍을 바라보고 동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나는 죽음을 너무나 두려워합니다. 이 빈대 투성이인 인간의 궁핍을 그 누구도, 어느 정당도 자랑스럽게 내세우지 않습니다. 목매달 나무못 하나, 깔아놓을 더러운 누더기 하나 없는 이 끔찍한 보금자리들을 향해, 공산주의는 안전한 먼 곳에서 말합니다. 모든 것은 사회 체제 탓이라고요. 2년 후, 20년 후에 혁명의 깃발이 휘날리게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어떻게 그렇단 말입니까? 2년 후, 20년 후에? 당신들은 그들이 앞으로 2달, 2주, 2일을 더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무관심하게 동의할 수 있단 말입니까? 여기서 도울 수도, 도우려 하지도 않는 부르주아 계급은 내게 낯설지만, 도움 대신 혁명의 깃발을 제시하는 공산주의 또한 마찬가지로 내게 낯설습니다.


공산주의의 목표는 지배하는 것이지, 구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깃발에 쓰인 구호는 권력이지, 도움이 아닙니다. 빈곤, 실업, 기아.... 이것들은 공산주의에게는 수치스러운 것도, 견딜 수 없는 고통도 아닌, 분노와 격노의 소용돌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힘을 담는 그릇일 뿐입니다.

 

"그래, 이 모든 것은 사회 체제 탓이야."


아닙니다. 죄는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고통을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바라보든, 혁명의 깃발을 하늘 높이 들고 바라보든 말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의 계급이 아닙니다. 그들은 바로 계급에서 벗어나고, 제자리에서 밀려나고, 조직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왕좌에 누가 앉아 있든, 결코 그 왕좌에 가까이 가지 못할 것입니다. 굶주린 자들은 권력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배부름을 원합니다. 궁핍 앞에서는 누가 나라를 통치하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이 무엇을 느끼는가입니다. 궁핍은 하나의 계급도, 제도도 아닙니다. 그것은 불행입니다. 하지만 내가 인간적인 동정심을 찾아 주위를 둘러볼 때, 나는 계급 지배라는 냉혹한 교의에 부딪힙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는 고통받는 이들을 돕고 동정하는 도덕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회 질서는 제거하겠다고 설교하지만, 궁핍이라는 끔찍한 무질서는 제거하겠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불쌍한 이들을 돕는 데 동의한다면, 단 하나의 조건 아래서 일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권력을 잡고, 그다음에 (아마도) 당신의 차례가 될 거라고요. 유감스럽게도, 이런 조건부 도움 약속조차 아무런 보장이 없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결코 대중도 아닙니다. 천 명의 거지는 빵 조각 하나조차 나눌 수 없습니다. 거지, 굶주린 자, 무기력한 사람은 완전히 고독합니다. 그의 삶은 오직 그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 다른 이들의 삶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개별적인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불행이 다른 경우들과 꼭 닮았다고 해도 말입니다. 사회를 아주 뒤집어엎어도, 그때도 거지들은 다시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이며, 거기에 다른 이들도 더해질 것입니다.


나는 전혀 귀족처럼 느껴지지 않지만, 대중의 큰 가능성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사실 대중이 국가를 통치할 것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들은 단지 정치적 재료로 이용될 뿐이며, 다른 정당의 당원들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무자비하게 이용됩니다. 사람을 재료로 바꾸려면, 그를 으스러뜨리고 구두쇠에 끼워 넣어야 합니다. 그에게 표준화된 천이나 표준화된 사상으로 만든 제복을 입혀야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사상적인 제복은 1년 반쯤 지나서 벗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공산주의자들을 깊이 존경할 수 있었을 것은, 그들이 노동자에게 다가가 이렇게 솔직하게 말했다면입니다.

나는 너의 이런저런 것들이 필요하다네. 하지만 너에게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겠어. 너는 개별 단위, 재료로서 내게 필요할 뿐이야. 네가 공장에서 그러했듯이 말이지. 너는 지금처럼 똑같이 침묵하고 복종하게 될 거야. 그 대가로, 모든 것이 변했을 때, 너는 네가 그랬던 것처럼 그대로 남아 있을 거야. 네 처지가 나아질지, 나빠질지는 보장할 수 없다. 새로운 질서는 너에게 더 관대하지도, 더 호의적이지도 않을 것이지만, 분명 더욱 정의로울 거야.

 


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이런 제안을 듣고 진지하게 고민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제안은 지금까지 약속된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수용 가능했을 것이고, 오히려 더 수용 가능했을 겁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약속으로 먹이는 것은 그들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가지 위에 살찐 거위들이 매달려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살기가 좀 더 수월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백 년 전이나 오늘이나, 하늘의 두루미나, 정확히 말하면 정부 기관 지붕 위의 두루미보다는 손 안의 참새가, 아니면 저 멀리 궁전 지붕 위의 붉은 수탑보다는 아궁이의 불이 더 나은 법입니다. 게다가 그런 궁전들은 계급의식으로 세뇌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부유한 민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개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보통 가난한 자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정반대입니다. 어떤 경우든 가난한 자가 가장 큰 위험을 감수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무언가를 잃는다면, 그것은 마지막 빵 조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빵 조각을 가진 거지를 상대로 실험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회적 격변도 소수의 어깨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대다수를 휩쓸어갑니다. 전쟁이든, 화폐 위기든, 다른 무엇이든, 바로 가난한 자들이 가장 고통을 받습니다. 네, 가난은 일반적으로 경계도, 바닥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믿을 수 없는 지붕은 부자들의 집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집 위에 있습니다. 세상을 한 번 흔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누가 가장 먼저 흙에 파묻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개인적으로 나는 '발전'이라는 말에 별로 현혹되지 않습니다. 내게는 궁핍이 세상에 유일하게 발전하지 않고 오직 무질서하게만 증식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가난한 자들의 문제를 어떤 새로운 체제가 수립될 때까지 미룰 수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정말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사실, 문제는 현대 세계가 충분한 도덕적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아니오'라고 단언합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그들과 갈라섭니다. 나는 우리의 사회라는 소돔에 충분한 의인이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소돔의 주민인 우리 각자 안에는 의인의 어떤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많은 노력 끝에,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많은 확신들 뒤에, 상당히 괜찮은 정의에 대해 합의를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공산주의 교의에 따르면, 합의는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아마도 공산주의는 대부분 사람들의 인간성에 대한 불신 자체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하겠습니다. 우리 사회는 실업자, 노인, 병자들을 돕기 위한 조치들이 시행되었을 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지 않지만, 가난한 이들과 나에게는 그런 조치들이, 그 찬란한 순간, 혁명의 깃발이 하늘에 휘날리는 그 순간을 애타게 기다리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즉시 시행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가난의 문제를 푸는 것이 미래 사회 체제의 과제가 아니라 현재 사회 체제의 과제라고 믿는 것, 바로 이것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나의 뜻입니다. 20년 후의 혁명보다 오늘의 빵 한 조각과 난로의 온기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 것은,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먼 기질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공산주의에서 가장 놀랍고 가장 비인간적인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어두움입니다. 상황이 나쁠수록 그들에겐 좋습니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귀먹은 할머니를 치면, 그것은 현재 체제의 부패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노동자의 손이 기계 톱니바퀴에 끼이면, 분명히 그 불쌍한 손을 으스러뜨린 것은 육식적으로 즐거워하는 부르주아입니다. 각자 사적인 이유로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잔인하게 악의에 차 있고, 그들의 마음은 고름덩어리처럼 역겹습니다. 그들에게 현대 사회에는 선함이 조금도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쁩니다.


지르지 볼케르는 그의 연가 중 하나에는 이렇게 쓰였습니다.

네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나는 증오를 보네, 가난한 자여..

 

증오는 끔찍한 단어입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이것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오히려 놀랍고 아름다운 명랑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장의 노동자는 사장이나 임원보다 더 많이 농담을 합니다. 건설 현장의 석수들은 건축가나 현장주보다 훨씬 더 즐겁게 지냅니다. 그리고 만약 집에서 누군가 노래를 부른다면, 분명히 바닥을 닦는 하녀일 것이지, 그 집 안주인은 아닐 것입니다.

 


소위 프롤레타리아는 타고난 기질상 즐겁고 거의 어린아이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적인 비관론과 어두운 증오는 인위적으로, 게다가 깨끗하지 않은 방법으로 그들에게 주입됩니다. 이 막막한 어두움의 수입을 "대중의 혁명적 교육" 또는 "계급의식의 강화"라고 부릅니다. 가난한 자는 본래 가진 것이 별로 없는데, 그로부터 원초적인 삶의 기쁨마저 빼앗깁니다. 이것은 미래의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부채 상환의 첫 번째 거름입니다.


공산주의의 풍토는 불친절하고 비인간적입니다. 그들에게는 부르주아적인 한기와 혁명적인 불꽃 사이의 중간 온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조용히 그리고 즐겁게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점심이나 저녁 식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거지의 곰팡이 핀 빵 조각 아니면 자본가들의 폭식뿐입니다. 사랑도 없습니다 — 오직 지배층의 방탕이나 프롤레타리아의 무절제한 번식만이 있을 뿐입니다.

부르주아는 자신의 부패한 냄새를 들이마시고, 프롤레타리아는 폐결핍적인 악취를 들이마십니다.

 


나는 언론인들과 작가들이 세상의 모습이 그렇게 무의미하다고 스스로에게 세뇌했는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지 분간하지 못합니다. 내가 아는 것은, 보통 프롤레타리아인 순진하고 경험이 없는 사람이 끔찍하게 왜곡된 세계에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세계는 정말로 뿌리째 파괴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세계는 허구이기 때문에, 혁명적 행동에 의해서라도 이 우울한 허구를 뿌리째 파괴하는 것이 매우 시의적절할 것입니다. 그런 일이라면 내가 기꺼이 참여하겠습니다.


물론, 우리의 슬픔에 골짜기에는 무한한 고통이 많고, 불행이 지배하며, 행복과 더더욱 기쁨은 너무 적습니다.


내 개인적으로 세상을 지나치게 장밋빛으로 묘사하는 성향이 없다고 믿지만, 내가 공산주의의 막막한 어두움과 비극성을 마주할 때면, 분노하며 항의의 외침을 하고 싶어집니다. 아니, 이건 사실이 아니야, 세상은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고!


나는 구멍 난 양파 하나를 거지에게 건네는 것과 같은, 구원에 대한 작은 희망이라도 얻을 자격이 없는 사람은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적당히 냉정하고 이성적인 하느님이 불과 유황을 부으려 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세상에는 진실한 악보다 제한적인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인류를 절망적으로 외면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동정심과 신뢰, 친절함과 선의라면 있습니다.


나는 오늘날의 인간도, 내일의 인간도 완벽할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평화로운 발전도, 혁명도, 심지어 인류 전체의 완전한 파괴도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 죄 많은 존재들 각자에게 있는 선한 것을 모두 모을 수 있다면, 그 위에 지금까지 존재했던 그 어떤 세계보다 훨씬 더 사랑스러운 세상을 세울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믿습니다.


당신은 이것이 썩은 박애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네, 저는 정말로 인간이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그런 바보들 중 하나입니다.


숲이 검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지만 숲 속의 각 나무는 전혀 검지 않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검고 또 녹색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통의 소나무나 전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나쁘다고 주장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절대적으로 나쁜 사람을 찾아보십시오! 세상을 거친 단순화 없이 판단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원칙들은 곧 털어야 먼지나 조금 나올 겁니다.


공산주의의 전제는 의도적이거나 거짓된 삶에 대한 무지입니다. 만약 누군가 자신이 독일인을 미워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에게 독일인들 사이에서 살아보라고 제안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그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정말로 자신의 독일인 하숙집 여주인을 미워하는지, 독일인 사탕 가게 주인을 족치고 싶은 욕망이 있는지, 성냥을 파는 게르만 할머니를 목 졸라 죽이고 싶은지 말입니다.


인간 정신의 가장 비도덕적인 속성 중 하나는 일반화하려는 경향입니다. 현실을 이해하는 대신 그것으로 대체해 버리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신문에서 당신은 세상이 무가치하다는 점 외에는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평범함이 창조의 절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다소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증오, 무지, 원칙적인 불신] 이것이 공산주의의 정신세계입니다. 의학적 진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병리학적 부정주의 사례가 있습니다. 개인이 대중 속에 녹아들면, 그는 쉽게 이런 감염에 취약해집니다. 그러나 사적인 삶에는 이것이 적합하지 않습니다. 길모퉁이에 있는 거지 옆에 잠시 멈춰 서 보십시오. 지나가는 사람들 중 누가 그를 위해 동전 한 닢을 꺼내는지 주의 깊게 보십시오. 열 번 중 일곱 번은 자신들도 궁핍의 경계선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나머지 세 번은 여성들입니다.


이 상황에서 공산주의자는 아마도 부르주아에게는 마음이 없다고 결론지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훨씬 더 기쁜 확신에 도달합니다. 프롤레타리아는 대체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동정과 사랑과 자기 희생에 기울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그들의 증오와 계급 분노로 이 사람을 짐승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그런 굴욕을 받을 만한 자들이 아닙니다.


현대 세계는 증오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의를, 합의를, 협력을, 그리고 훨씬 더 다정한 도덕적 풍토를 필요로 합니다. 나는 심지어 가장 평범한 사랑과 정성의 조금도 아직 기적을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현대 세계를 변호하는 것은, 그것이 부자의 세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가난한 자들의 세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자본의 맷돌과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증오 사이에 끼어 있는, 어떻게든 인간 가치의 대부분을 지지하고 보존하는 그런 사람들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가장 부유한 만 명의 사람들을 가까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판단할 수 없지만, 나는 부르주아지라고 불리는 그 계급으로 판단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썩은 비관론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느 정도 그들을 변호할 권리가 있습니다. 물론 그들의 결점과 악덕에 대해서도 눈을 감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계급을 대체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그 안으로 흡수될 수는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교묘한 미학적 프로그램을 짜더라도 말입니다. 순수하게 민족으로 지적인, 귀족적인, 또는 종교적인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문화에 남아 있는 모든 것은 중간 계층, 소위 지식인 계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이 전통 발전에 참여할 권리를 요구한다면, 만약 그들이 이렇게 선언한다면: "좋아, 내가 현대 세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모든 가치들을 관리하겠다!" — 아마도 일단 그 제안을 받아들여 시험해 볼 가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그들이 부르주아 문화라고 부르는 모든 것을 쓸모없는 쓰레기라고 싸잡아 배제하며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때는 실례하겠습니다. 책임감을 완전히 잃지 않은 사람이라면 무엇이 그렇게 말살될 지부터 우선 계산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이미 진정한 궁핍은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불행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모든 질서를 어떻게 다시 짜더라도, 불행이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 그가 아프고,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말하든, 불행과의 싸움은 사회적인 의무가 아니라 도덕적인 의무입니다.


공산주의의 언어는 무자비합니다. 그것은 동정, 자비, 도움, 인간 연대와 같은 가치들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에게는 감상주의가 없다고 자만하며 말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가장 나쁜 점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감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하녀처럼, 어떤 바보처럼, 어떤 정직한 사람처럼 감상적입니다. 오직 불량배들과 선동가들만이 감상적이지 않습니다. 감상적인 이유 없이는 당신은 이웃에게 물 한 잔도 건네지 않을 것입니다. 이성적인 이유는 당신으로 하여금 미끄러져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조차 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폭력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나는 '폭력'이라는 말에 십자가를 긋는 늙은 처녀가 아닙니다. 고백하건대, 때로는 헛소리를 하거나 단순히 거짓말을 하는 사람을 마구 때려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내 힘이 부족하거나, 그가 스스로를 방어하기에 너무 약하기 때문입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싸움꾼이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부르주아들이 프롤레타리아를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선언한다면, 저는 즉시 짐을 싸서 교수대로 끌려가는 그 사람을 돕기 위해 달려갈 것입니다.


품위 있는 사람은 위협하는 자들을 지지할 수 없습니다. 총살과 교수형을 부르짖는 자들은 사회적 변혁을 일으킴으로써가 아니라,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도덕 법칙을 파괴함으로써 사회를 타락시킵니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상대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내 특별하고, 아주 심각한 지적인 죄과 때문에 말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흑인 동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과 모든 문학을 파고들며, 약간의 인내심을 보여주면 모든 사람들, 어떤 피부색이든, 어떤 신앙을 가졌든,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떤 신비로운 기쁨과 함께 발견합니다.


아마도 어떤 공통된 인간의 논리와, 사랑, 유머, 낙관주의, 또는 맛있게 먹고 싶은 욕망과 같이 존재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많은 다른 것들 같은 공통된 인간 가치의 저장고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나는 공산주의자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나는 공산주의의 이상에는 공감하지만, 그 방법을 깨닫지 못합니다. 때로는 그들이 나에게 이해되지 않는 외국어를 말하고, 그들의 사고가 다른 법칙을 따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한 민족은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든 적응해야 한다고 믿고, 다른 민족은 서로를 잡아먹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이것은 물론 매우 실질적인 차이이지만 결코 원칙적인 차이는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어떤 상황에서는 사람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총살하는 것이 빈대를 짓이기는 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체코어로 설명을 들어도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 안에는 끔찍한 혼란의 인상이 떠오르며, 우리가 결코 서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끔찍한 예감이 듭니다.


나는 사람이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어떤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표지판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의 방법은 국제적인 오해를 창조하려는 대규모 시도입니다. 이것은 인류를 서로 연결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개별적인 부분들로 쪼개려는 시도입니다. 한쪽 편에게 좋은 것은, 다른 쪽 편에게는 단순히 좋을 수 없다고 합니다. 마치 이쪽과 저쪽의 사람들이 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똑같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가장 정통적인 공산주의자를 내게 보내주십시오. 만약 그가 그자리에서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나는 공산주의와 관련이 없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그와 개인적으로 의견이 일치하리라 희망합니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원칙적으로, 공산주의와 관련이 없는 모든 것에 대해서조차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과의 합의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와 지라도의 기능에 대해 이야기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에게 그것은 부르주아 과학이라고 즉시 설명해 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시, 부르주아 낭만주의, 부르주아 인문주의 등이 존재합니다.


어떤 하찮은 문제에 대해서도 공산주의자들에게서 거의 초인적인 설득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그들의 주장이 그렇게 설득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들은 반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전혀 신념이 아니라, 어떤 의례적인 규정이거나, 결국에는 단순히 직업일 뿐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내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이런 식으로 나머지 교양 있는 세계로부터 완전히 격리되고, 미래 혁명의 매혹적인 전망 외에는 그에 대한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는 프롤레타리아들입니다.


공산주의는 그들과 세계 사이에 경계선을 세웁니다. 그리고 바로 당신, 공산주의 지식인들이여, 당신들이 그들와 그들을 새로 도착한 자들을 위해 준비된 모든 문화적 가치들 사이에, 당신들의 화려하게 그려진 방패를 들고 서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평화의 비둘기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당신들 사이에 자리할 곳이 없다면, 그것은 당신들 머리 위로 날아 하늘에서 직접 내려올 수도 있습니다.


내가 비록 무언가는 말해내서 안도감을 느끼지만, 이것은 아직 전부가 아닙니다. 마치 고해를 한 것 같은 기분입니다. 나는 어떤 정당에도 속하지 않으며, 공산주의와의 나의 논쟁은 신조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양심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만약 신조가 아니라 양심에 호소할 수 있다면, 서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1924년.

 

 

 


 

ㅡ반공과 반러

 

 

로봇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체코의 극작가가 1924년에 쓴 글이라고 합니다. "신조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양심의 문제"까지 거론하며 그의 비장함까지 느껴지실까요? 저는 이런 종류의 반공/반러 작가들을 무수히 보았습니다.

"오토바이 운전자가 귀머거리 노부인을 치면"이라는 대목에서 이 글이 1924년이 훨신 지난 후에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며 카렐 차페크가 전형적인 유로나치이자 독일과 영국 양쪽에 영합하며 러시아 혐오로 활동했다는 점도 알려드립니다. 그는 공산주의 자체가 아니라 러시아라는 나라를 거부하는 글을 주로 썼습니다.

독일군이 체코에 와서 항상 자신들에게 복종해 온 체코인들을 잔혹하게 짓밟았을 때, 그는 너무 화가 나서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소련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그의 작품이 대량으로 출판되기 시작했으니,,  소련이 아니었다면 오래전에 잊혀졌을 사람입니다.

이와 비슷한 유형의 작가에는 폴란드의 반소련 러시아 혐오주의자, 스타니슬라프 렘이 있습니다.

 

인간성에 호소하며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오도하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와 부르주아라는 아주 명확한 문제에 대해서도 기득권 세력은 이 문제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고, 지식인들은 이에 일조합니다.

20세기 초, 특히 1924년 무렵, 공산주의는 그 10년 전인 1914년보다 훨씬 더 명확해졌습니다.(인류가 처음으로 겪은 구체적인 공산주의 모습) 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사회사상을 실현하려는 시도로 이어진 것은 바로 사회 대혁명이었고, 이러한 현실은 트로츠키류의 사회민주당이 말했던 모호한 사상을 폭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는 환상이 아닌 실천에 기반하여 등장했습니다. 실천 또한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진실의 기준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진실은 주변 자본주의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수백만의 소외된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적어도 자녀들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고자 하는 열망이라는 단순한 사실이었습니다. 과학기술 혁명은 말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존재했습니다. 서유럽의 상황은 동유럽보다 덜 심각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동유럽에만 존재했고, 러시아 제국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산주의(스탈린주의) 사상은 어떤 면에서는 단순하고 현실적이었습니다. 노동 생산성이 노동의 성과를 적절히 분배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번영이 보장될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소련에서는 전쟁 중 파괴되었거나 러시아 제국의 자본주의 발전 부진으로 인해 생산이 중단되었던 것을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가 유일한 과제였습니다. 집단주의와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성공적으로 확립되었지만, 그 공로를 인정하자면, 대중의 정의는 희생자들에게 결코 인도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건국명을 잘 보세요. 공산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 전 단계인 사회주의입니다.)은 효과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만약 2차 대전이 없었다면 그 결과는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정말 안타깝게도, 대조국전쟁은 러시아 국민(그리고 소련 내 다른 국가들)을 파탄냈습니다. 가장 훌륭한 사회주의자들은 목숨을 잃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녀들의 평화와 안락을 꿈꿨습니다. 하지만 소련이 어떻게 그리고 왜 멸망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공산주의(사회주의)가 매우 명확하고, 즉각적인, 구체적인 프로그램으로 제시되었다는 것입니다.(논의가 길어질 것이니 여기서 중단합니다.)

 

어쨌든,,, 지금의 러시아가 공산주의일까요? 그런데 왜 서구인들은 아직도 러시아를 혐오할까요?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혐오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자칭 "보수"들은 중국식 사회주의(그들에게는 공산당이나 빨갱이)가 미운 걸까요, 중국인 그 자체가 싫은 걸까요?

 

공산주의에 대해 병적인 혐오를 가진 MZ 세대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들이 공산주의에 대해 아는 것은 단지 "자체 모순으로 붕괴했다"는 어이없는 프로파간다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스스로 "보수"라고 떠벌이는 사람들의 민낯입니다.

"자유민주주의"의 현실

 

이런 현상을 비판하는 데 명석한 공산주의자까지 될 필요는 없습니다.